칼 바르트의 교회론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기도 하는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공부하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자칫 교회론적 영지주의에 빠질 수 있는데 그 위험을 잘 간파한 것이 참 좋았습니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반드시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현존한다.’고 못 박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제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칼 바르트는 ‘예수는 교회이고, 교회가 곧 구원의 길이고 도구였던 것’으로 보는 점입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로 존재하시지만, 교회가 곧 그리스도라는 명제는 틀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 바르트가 생각하는 교회는 ‘성도들의 민주적 사귐 공동체’이고 그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만이 기여 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고, 기도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날의 교회들은 의료기관도 아닌데 의료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가 섭니다.
오늘 날의 교회들은 사설학원도 아닌데 입시반, 숙제도우미 방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가 섭니다.
이럴 때에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저는 다 좋게 보아달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전파되는 이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의 본질 혹은 고유사명과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좋게 보아주자는 것입니다.
최소한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며 서로 비난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론이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교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기관에도 부여 되지 않은 복음전파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대사명이 있음으로 해서 교회 고유의 사명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한스 큉의 교회론
한스 큉은 교회의 본질을 하나님의 백성(세상과 구별 됨), 성령의 피조물(성도들이 은사로 섬기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세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표징과 도구)으로 부른다고 보았습니다.
한스 큉은 교회의 본질을 실현하면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가 된다.’고 봅니다. 이는 니케아공의회의 신조를 새롭게 해석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의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해 세속과 구별 된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스에 의하면, 거룩성은 교회의 일치를 요구합니다. 교회가 일치함을 보려면 보편성(악인이 함께 공존하는 교회)이 요구 됩니다. 교회의 보편성이 없이는 일치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보편성(악인이 함께 교회 안에 공존하는 것)을 어느 선까지 인정 할 것인가? 한스는 사도성을 상실한 교회는 보편성에서 제외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바로 이 사도성입니다.
카톨릭은 사도성을 예수-베드로의 후계자들에서 찾는 반면에 개신교는 ‘사도적 사명’에서 찾고 있습니다. 한스 큉에 의하면 사도들은 계속 나타날 수 없지만, 사도직은 계승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사도직은 교회에만 계승 되는 것입니다. 즉, 특정한 개인이 ‘사도’가 아니라 교회가 ‘사도적 교회’라는 것입니다(이 점이 중요합니다. 요즘 자칭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스큉이 이해하는 교회의 직무도 참 인상적입니다. 그는 공동체를 직무에 종속 시키면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며, 반대로 직무를 공동체 종속 시키면 교회는 세속화의 위험에 빠진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한스는 공동체는 목회자에게 복종하고, 목회직은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한스 큉은 교회의 사명을 세상에 파송 된 교회로 봅니다. 즉 세상에 책임 있는 교회-타자를 위한 교회인 것입니다(본휘퍼).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는 교회(몰트만)를 말합니다.
한스 큉은 섬김 없는 복음증거도 문제지만, 복음증거 없는 섬김은 더욱 큰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과 자기 보존에 치우쳐 이웃의 고난을 못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웃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해서 증언을 잃어버린다면 더욱 큰 문제라는 말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파란 글씨로 한 이유는 이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교회들이 [십자가-부활-재림]을 제대로 세상 속에 전하지 못하고 있고
교회 안에서는 [고난-능력-참소망]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을 파란 글씨로 소개합니다.
위르만 몰트만의 교회론
몰트만의 교회론은 세상을 섬기는 교회요, 선교적인 교회입니다.
그의 의하면 교회는 평등한 자들의 자유로운 사회이며 친구들의 열린 교제입니다.
몰트만에 의한 교회는 자유 안에서 하나 됨, 압박 받는 자들 편에 서기, 가난에 동참하는 거룩성, 고난 가운데 있는 사도직입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교회성장이란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는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몰트만의 교회론을 교회가 수용하게 되면 ‘교제는 강화 될 수 있지만 복음선포와 증언은 약화 될 수 있다.’는 것과 ‘목회적 돌봄이 약화 될 수 있다.’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저는 사실 몰트만의 교회론 가운데 어떤 특정한 부분이 좋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구역 안에서는 잘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볼프 하르트 판넨베르크의 교회론
판네베르크는 역사가 미래에서 오늘로 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택하신 것도 교회를 위한 공동체가 아닌 미래의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12지파, 12제자로서의 부르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구원의 신비를 통하여 메시야적 공동체의 성격을 가진 교회가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세상으로 부름을 받았고 동시에 세상을 향해 나가는 왕같은 제사장적 직무가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정의과 공의가 교회의 본질이 됩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복음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실행됩니다.
하지만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제도적 장치도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교회는 메시야적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삶을 이어가는 새로운 종말론적 공동체인것입니다


